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쿠릴 열도 분쟁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이 섬들의 원래 주민은 [[아이누]][* [[쿠릴 아이누]]는 쿠릴 열도 중에서도 우루프 섬 이북에 사는 자들이었다. 해당 분쟁의 중심인 쿠나시르와 이투루프에 살던 아이누는 [[홋카이도]] 아이누와 동계이다.]였으나 국가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, 역사적으론 [[일본]]과 [[러시아]]가 초기에 어느 쪽의 영토로 상호인식했는지 애매하다. 일본은 [[1644년]] [[에도 막부]] 3대 [[쇼군]] [[도쿠가와 이에미츠]] 시절부터 이미 일본의 [[영토]]였다고 주장하는 한편, 러시아는 자국 [[탐험가]] 알렉세이 알렉세예비치 포포프(Aleksey Alekseyevich Popov)가 [[1649년]]에 열도를 발견하였다고 주장한다. 하지만 실제로 양국 모두 [[17세기]]에 쿠릴 열도를 직접 지배지로 편성하진 못했다. [[18세기]]에 들어서면서 쿠릴과 [[사할린]] 지역을 두고 러일 양국 간의 기싸움이 더욱 심화된다. [[에도 막부|일본]]은 일본대로 [[마츠마에 번]]이 [[1754년]] 쿠나시르, 이투루프, 우루프 일대에 장소(가신의 지행지)를 설치하여 남쿠릴 지역을 간접적으로 관리하였으며, [[루스 차르국|러시아]]는 러시아대로 [[1711년]]부터 [[카자크]]를 중심으로 하는 [[러시아 극동|극동]] 탐사대가 [[캄차카 반도]]에서 홋카이도 동해안까지 탐사를 이어가며 쿠릴 열도 원주민들로부터 조세를 거두었다. 이 중 쿠나사르를 비롯한 남쿠릴의 경우 지리적인 이유로 일본의 영향력이 더욱 강했다. [[1807년]]에는 에도 막부의 [[쇄국]] 정책에 대한 불만으로 [[러시아 제국|러시아]] [[상인]]들이 사할린, 이투루프 등에 위치한 [[일본인]]들의 거점을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[[오호츠크 해]] 일대를 두고 양국 간의 경쟁이 심화되었다. [[1855년]] 일본과 러시아는 러일화친조약(시모다 조약)에서 일본의 북방 국경을 이투루프-우루프 섬 사이로 정하고, [[사할린]](일본명 [[가라후토]])은 양국의 공동 관할지(잡거지)로 삼았다. 그러나 사할린 내 러시아와의 파워 게임에서 부담을 느낀 [[일본 제국|일본]]은 [[1875년]] 사할린에서 손을 떼는 대가로 쿠릴 열도(일본명 [[치시마]] 제도) 전체를 교환하자고 제안했으며, 이것이 성사되어 사할린-치시마 교환조약([[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]])이 체결되고 일본은 쿠릴 열도를, 러시아는 사할린 전역을 점유하였다. [[1905년]] 일본은 [[러일전쟁]]을 일으켜 러시아를 제압하고 [[미국]]의 중재 하에 [[포츠머스 조약]]을 통하여 원래 러시아가 가졌던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까지 수중에 넣었다. 이후 일본은 [[2차 세계 대전]] 동안 [[나치 독일]]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[[소련]]을 건들지 않을 테니 대신 일본이 [[동인도]], [[인도차이나]] 등을 침공하는 것에 간섭하지 않으며 서로의 영토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소련-일본 중립 조약을 소련에 요구하여 [[1941년]]에 체결했다. 그러나 나치의 패망 이후 소련은 [[얄타 회담]]에서 대일전 참전을 대가로 러시아가 과거 러일전쟁을 통해 빼앗긴 러시아의 영토권(남사할린)을 회복하고 쿠릴 열도를 다시 이양받는 것을 허가한다는 약속을 받았다. 전쟁의 대가를 미국으로부터 약속받은 소련은 [[만주 전략 공세 작전]]을 개시, [[소일전쟁|일본 제국과의 전쟁]]을 치렀다. 이후 소련은 일본 제국이 항복한 이후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식적인 항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[* [[일본의 항복|일본의 공식 항복]]은 9월 2일 [[미주리함]]에서 이루어졌다.] 소련에 떼어주기로 [[미국]]이 약속한 영토를 남김없이 확보하기 위해 전투를 계속 개시해 [[1945년]] 8월 18일 [[슘슈 섬 전투]]를 시작으로 9월 3일에 쿠릴 열도 전역을 점령했다. 당시 [[이오시프 스탈린]]은 [[미국]]에 홋카이도 반분까지 요구했으나 미국의 [[해리 트루먼]] [[미국 대통령|대통령]]이 이를 거부하자 미국과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쿠릴 열도 점령으로 만족했고 미국도 이를 묵인했다. 일본의 패전 이후 열린 [[도쿄 전범 재판]]에서 소일 중립 조약은 “성의 없이 체결된 조약으로서 소련에 대한 일본의 침략 기도를 진행하려는 수단으로 이용된 것”이라는 판결을 통해 무효화 되었으며 일본은 쿠릴 열도 전체의 영유권을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긴 [[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]]에 서명하였다. 정작 소련이 본인들은 조약 작성에 초대되지 않았다는 점, 일본의 [[군국주의]] 재발에 대한 대책안이 없다는 점, 그리고 일본의 가장 큰 피해국인 [[중화민국|중]][[중화인민공화국|국]]이 조약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본이 구 영토의 영유권을 포기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였지만 [[얄타 회담]] 때의 약속을 토대로 쿠릴 열도는 자연스럽게 소련의 영토로 귀속되었다. 그러나 [[1950년대]]에 일본은 소련이 당시 조약을 통하여 가져간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군도는 쿠릴 열도에 포함이 되지 않는다며 이때부터 소련에 반환 요구를 시작하였다. 이후 [[1960년대]]에는 쿠나시르 섬과 이투루프 섬 역시 역사적으로 쿠릴 열도가 아닌 일본의 북방 영토에 포함된다며 이른바 북방 4도라 부르는 총 4개 섬의 반환을 요구하였다. [[1956년]] 일소공동선언에서 평화조약 체결 후 소련은 시코탄 섬과 하보마이 군도를 일본에 반환하기로 합의했으나, [[1960년]] 일본이 미국과 [[미일안보조약]]을 개정하자 소련은 거세게 반발하며 영토 반환 체결을 거부하여 교섭은 결렬되었다. 이후 일본에서도 사회-정치의 [[일본의 우경화|우경화]]가 심화됨에 따라 섬 두 개를 받을 게 아니라 아예 북방 4도를 전부 돌려받자는 여론이 커졌고, 결국 이것이 정론이 되었다. 심지어 [[일본 공산당]]은 [[쿠릴 열도]] 전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. 이유인 즉,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사할린을 포기하는 대가로 쿠릴 열도 전체의 일본 영유가 확정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. 만약 일본 공산당이 집권한다고 가정한다면, [[한일관계]]의 급개선과[* 이쪽도 엄연히 따지면 [[독도]]는 일본 영토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, 독도와 [[위안부 문제]] 등에서 [[일본 극우사관]]을 부정하므로 실시간으로 어그로를 끄는 현 [[일본 자민당]]보다 대화 상대로서 훨씬 낫다.] [[러일관계]]의 끊임없는 악화라는 [[양날검]]과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. 물론 이같은 상황은 미국에는 매우 큰 호재로 작용할 것이다. 명분과는 별도로 홋카이도 자체가 [[교토시|교토]], [[도호쿠]], [[오키나와현|오키나와]] 등지와 더불어 일본에서 진보좌파 [[혁신정당|혁신계]]가 나름 선전하는 지방 중 하나이고 현지 중요 지지기반 중 하나가 구 [[가라후토]]를 비롯한 북방 [[실향민]]과 [[어민]]들이라 이 문제에 강경한 것으로 보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